미국에 온 첫해부터 열심히 가드닝을 했다. 보통 가드닝은 커뮤니티 가든에서 작은 플랏을 받아하게 된다. 학생 아파트의 커뮤니티 가든은 바로 집 근처에 있고 또 가격도 저렴한 편이어서 계속 신청을 했다. 요령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부지런하지 못해서인지 막상 수확할 때가 되면 결과가 형편없지만, 의욕만큼은 전문 농사꾼 못지않다. 반드시 내년에는 더욱 잘 해내리라 다짐하며 겨울을 맞이한다.



커뮤니티 가든을 가보면 국적별로 혹은 인종별로 각자 꾸미는 가든 스타일이 다르다. 일단 백인 할머니들의 경우 가든을 예~쁘게 꾸민다. 작물은 띄엄띄엄 심어 통로를 크게 내고 꽃을 많이 심는다. 미국 사람들은 꽃을 참 좋아한다. 반면 중국 사람들이 꾸미는 가든은 정 반대다. 꽃 같은 거 심을 자리는 사치다. 땅도 크게 빌려서 규모 있게 농사를 짓는다. 옥수수도 심는 등 작물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한국인의 가든은 딱 보면 알 수 있다. 바로 깻잎만 엄청나게 주야장천 심어놓은 밭이다. 왜 이렇게 깻잎만 심어놓느냐. 바로 깻잎이 너무 비싸서다. 우리 동네의 작은 한인마트에 가면 장당 50원 꼴로 깻잎을 살 수 있다. 깻잎 한번 먹으려면 가위로 예쁘게 4 등분해서 한 번에 한 조각씩만 살뜰하게 먹어야 할 판이다. 중국인들도 먹는 부추, 청경채 등은 아시안 마트에 가서도 쉽게 구할 수가 있고 많이 유통되다 보니 가격이 비싸지는 않다. 하지만 깻잎은 한국인만 먹으니 한인이 적은 곳에서는 비쌀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호박 키워서 부침개 해먹 어야지~ 여기에는 부추를 심는 거야~ 룰루랄라~ 하는 나와는 정반대로 남편은 가드닝을 매우 싫어한다. 처음 씨를 뿌리기 전, 밭을 일궈야 하고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물도 주고 잡초도 뽑아야 하니 작은 크기의 가든이라도 할 일이 너무 많다. 특히 남편은 가드닝을 통해 주로 수확하게 되는 토마토나 상추, 호박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좋아하지도 않는 야채를 키우기 위해 여름 내 노동을 해야 하니 언제나 입이 삐쭉 나와있다.


첫해 여름 수확했던 소중한 깻잎. 고기에 쌈도 싸 먹고, 장아찌도 담가먹고 소소한 즐거움을 느꼈다. 가드닝을 하면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화분에 작게 깻잎을 키우는 분들도 많다. 친한 집에 초대를 받아 갔는데 깻잎을 넣어 비빔국수를 해주면 어찌나 행복한지 모른다. 깻잎은 한국인들끼리만 통하는 식재료인 것 같다.

서울에서 살았던 나는 장롱면허였다. 우리 집 도보 15분 내로 지하철 4개 호선이 다니는 초 역세권에 살았던 덕에 대중교통을 아주 잘 이용하고 다녔다. 자차란 돈 먹는 하마일 뿐라고 생각했다. 필요하면 렌트하면 그만이었다. 


미국은 한국과 달라 차가 없으면 매우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남편은 그냥 차 없이 살자고 주장했다. 우리가 사는 도시는 비교적 버스 노선이 잘 돼있는 곳이어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사실 남편의 TA 월급으로는 두 사람이 렌트 내고 숨만 쉬어도 간당간당하기 때문에 차를 굴리며 유지비가 나가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미국 생활의 첫 9개월을 차 없이 보내게 되었다.



미국은 인구밀도가 낮기 때문에 일부 대도시가 아니고서야 대중교통망이 한국처럼 촘촘하지 않다. 버스 간격도 긴 편이며, 공휴일이나 주말에는 배차간격이 정말 길다. 평소 20분에 한 번씩 다니는 버스라면 새벽시간이나 저녁시간, 주말에는 1시간~1시간 반에 한 번씩 버스가 오게 된다. 차를 한 번 놓치면 매우 곤란하기 때문에 어디를 갈 때면 항상 구글맵을 켜서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또한 어디를 가려면 집에서 버스를 타고 다운타운까지 나간 후, 거기서 환승을 해야 했기에 시간이 더욱 많이 걸렸다. 차가 있으면 15분이면 가는 거리를 버스를 타고 가면 1시간 30분은 기본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버스로 가기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학과 모임이나 외부 행사로 가야 하는 곳은 종종 버스로는 갈 수 없는 장소가 많았다. 어디를 가려면 항상 라이드를 부탁해야 했다. 남에게 부탁을 잘 못하는 내 성격에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앞선 이야기들은 사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감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장보기였다. 아파트 근처 마트에는 일주일에 3번 학생 아파트와 마트 사이에 셔틀버스를 운영했다. 시간 맞춰서 정류장으로 나가면 마트까지 데려다 주니 너무 고마운 서비스였다. 문제는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이 셔틀버스 서비스가 중단된 것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하나는 버스를 1번 갈아타고 편도 30~40분 정도를 걸려 가장 가까운 마트를 가느냐. 혹은 버스를 타지 않고 30분 정도 걸어서 가장 가까운 마트를 가느냐. 나 혼자 움직이면 1시간이라도 걷겠지만 일주일치 우유, 고기, 과일 등을 이고 지고 한여름 땡볕 아래 움직이려니 너무나도 괴로웠다. 한 달 정도를 버텼을까 도저히 이렇게는 못살겠다 싶었다. 남편에게 말했다. "그냥 차 사자. 오늘 당장!"

작은 지역 공항으로 남편과 남편의 친구 부부가 나를 마중 나와주었다. 2번의 경유와 미국 땅에 처음 온 긴장감으로 24시간을 한 숨도 못 잔 나는 너무나도 피곤해서 남편을 반가워하지도 못했고 친구 부부께 감사의 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항공 수하물 2개, 기내용 캐리어 1개, 노트북 가방이라는 어마어마한 짐을 트렁크에 싣고 비몽사몽 하며 학생 아파트로 왔다.



학생 아파트는 남편이 사진으로 찍어 보내준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사진 속 모습보다는 훨씬 낡았고,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온 집안이 차갑게 느껴졌다. 거실과 부엌은 텅 비어있고, 냄비 몇 개와 커다란 쓰레기통 하나 있을 뿐이었다. 남편은 집의 다른 곳을 소개했다. 급한 대로 남편이 이케아에서 주문해 조립한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큰 방, 그리고 접이식 플라스틱 책상이 하나 놓인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첫 학기를 보내며 이 정도 살림을 장만한 것도 남편으로서는 큰 일이었다.


남편 학교의 학생 아파트는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매우 오래된 건물이었다. 시설이 낡다는 단점이 있지만 캠퍼스와 가깝고 캠퍼스 주변의 그 어떤 아파트와 비교했을 때 가장 저렴했다. 5년이라는 기나긴 유학생활을 버텨내기 위해 여러 불편함은 감수해야만 했다. 가장 불편한 점은 주차장이 옥외에 있다는 점이었다. 겨울이 되면 한 달에 두세 번은 삽을 들고나가 차와 차 주변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것이 일이다.



사실 이런저런 불만을 많이 늘어놓기도 하지만 이 아파트 단지를 떠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아름다운 주변 환경이다. 청설모, 칠면조 등 여러 자연 동물을 만날 수도 있고 여름철이면 저녁에 반딧불도 볼 수 있다. 단지 내에서는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아기 엄마들이나 자전거나 킥보드를 타며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항상 만나게 된다. 조금만 걸어나가면 예쁜 산책로도 있다.


내가 사는 지역은 백인 비율이 매우 높은 도시이다. 어디를 가든 백인만 있다. 하지만 이 학생 아파트 단지 내에서만큼은 minority라는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다. 유색인종인 내가 바로 이 아파트의 메인 스트림이니까 말이다.



또한 유학생 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필라델피아 여행에서 만났던 유펜 직원이었던 아저씨도 본인이 외국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에서 일한다고 소개하며 어떠한 이벤트를 여는지 등을 설명해준 적이 있다.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무래도 대개 영어나 미국 생활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이를 위한 프로그램이 많은 편이다. 교회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와서 진행하는 무료 영어 수업이나 이민, 안전 등과 관련된 설명회 등이 열린다. 또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벤트도 많다. 무료한 미국 생활에 나름의 즐거움을 주는 곳이다.


풀밭을 뛰놀던 쥐가 집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마트에서 카펫 청소하는 기계를 빌려 카펫 대청소를 해야 하고, 오래된 화재경보기가 고장 나 한밤중에 직원을 부르기도 하는 등 탈이 많은 오래된 아파트. 언젠가는 이 곳에서의 생활이 참 그리울 것 같다.

첫 데이트에서 남편은 박사과정 유학을 떠날 계획이라며 매우 조심스럽게 했었다. 당시에는 멋도 모르고 꿈이 있다는 것, 그리고 도전한다는 것이 참 멋져 보였다. 그 열정에 반해 결혼을 했다. 남편이 어학원 다니기 편하도록 역세권에 조그마한 전셋집을 얻고 남편은 유학 준비를 시작했다. 남편은 새벽같이 일어나 강남 어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스터디를 하고 밤늦게 들어왔다. 자식 뒷바라지도 아직 안 해보았건만, 1년 여 남편이 어학원 다니는 동안 나는 살림도 하고 밥도 해주며 뒷바라지를 했다. 


남편은 매월 토플과 GRE 시험을 치렀다. 끝이 없을 것 같던 막연한 준비의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함께 논문을 썼던 미국의 한 교수님 실험실로 박사 과정을 떠나게 되었다. 교수님이 입학을 제안했을 때, 다행히 남편은 학교에서 요구하는 모든 영어 점수를 다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우리의 짐은 단출하였다. 신혼살림이라고 해봤자 한국에서는 1년여를 보낼 계획이었어서 모두 남편이 자취할 때 쓰던 물건들을 집에 갖다 놓았다. 2구짜리 녹슨 가스레인지, 증기 배출이 잘 안 되는 전기밥솥, 오른쪽 칸은 정말 망가져버린 김치냉장고 등을 꾸역꾸역 쓰고 있었다. 국제 이사로 미국까지 들고 올만한 수준의 물건이 되지 못했다. 국제 이사를 해서 한국에서 쓰던 가구나 살림을 미국까지 다 가지고 오는 사람들도 많지만, 우리는 모두 버리고 왔다. 그나마도 돈이 되는 물건들은 중고나라에 팔거나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중고 가전제품을 구입하는 업체 아저씨를 한 번 불러 냉장고와 세탁기를 치우고 나니 집이 텅텅 비었다. 


남편은 한국을 떠나기 전, 아웃렛에 들려 두꺼운 겨울용 파커를 하나 장만했다. 남편이 합격한 대학은 미국 북부에 있어 겨울이 매우 혹독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 만으로는 불안해서 유니클로에 가서 플리스를 몇 개 샀다. 나는 파마를 했다. 미국은 파마 값이 매우 비싸다고 들어서 뽀글뽀글 감고 왔다. 그 외, 기초화장품 한 세트를 사고, 안경과 렌즈를 추가로 구입하였다. 항공 수하물만큼만 짐을 챙기기로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살 물건은 없었다.



미주나 유럽으로 어학연수나 유학 길을 떠나는 사람은 비슷할 것이다. 남편과 나는 각자에게 허용된 최대한의 수하물을 끌고 미국까지 왔다. 커다란 캐리어와 이민가방은 각각 32 Kg 씩 꽉 채워 수하물로 부쳤다. 친정 엄마가 방앗간에서 빻아온 고춧가루가 5 Kg 정도 되었고, 대부분 옷가지로 가방을 채웠다. 무게를 초과하면 곤란하기 때문에 친정집에서 몇 번이나 무게를 재보며 짐을 쌌다. 작은 크기의 기내용 캐리어도 꽉꽉 채워 넣었고 빈 공간에는 급하게 구입한 화장품들과 렌즈까지 쑤셔 넣었다. 어깨에는 노트북 가방을 메고, 귀중품, 여권, 항공권을 넣어 입국장에 들어갔다.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지쳤다.



개인 사정으로 갑작스럽게 출국을 하게 되면서 출국 10일 전, 비행기 티켓을 샀다. 비행기 표는 언제나 그렇듯이 제일 싼 것으로 샀다. 여행사 직원이 제일 저렴한 항공권 마지막 1장 남은 걸 내가 샀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성수기에 원하는 날짜에 그것도 가장 싼 값으로 갈 수 있어서 나도 매우 기뻤다. 사실 항공권만 구입하였고, 여러 출국 준비로 바쁜 탓에 별도로 정보를 찾아보거나 좌석 지정을 하지는 못했다. 



출국 당일, 전날 중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남동생에게 짐을 끌게 해 인천공항에 왔고 바로 비행기에 올랐다. 내 덕에 동생도 정신없이 한 주를 시작하게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보니,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인데 놀랍게도 기내에 개인 모니터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원래 유나이티드 항공에는 개인 모니터가 없다고 했다. 이것도 보르고 아무 준비도 안 하고 무작정 비행기를 탔던 나는 10시간 동안 멀뚱멀뚱 앞사람 등받이만 바라보며 미국까지 와야 했다. 더군다나 좌석 지정을 미리 하지 않은 탓에 자리는 가운데 자리. 내가 살 동네의 지역 공항까지 2번의 국내선을 더 탔어야 했는데, 국내선 역시 가운데 자리 당첨이었다!



드디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애초에 인천에서 출발할 때, 무려 3시간이나 비행이 지연된 탓에 뛰다시피 입국 심사를 받고, 짐을 찾고, 다시 국내선 게이트로 가서 짐을 부치고, 보안 심사를 받아 겨우 환승 편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이 국내선 비행기에도 역시나 개인 모나 터는 없었고, 4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놀랍게도 기내식을 주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미국 내 국내선 비행은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기내식을 주지 않는다. 많은 승객들은 미리 샌드위치나 햄버거 등을 사서 비행기를 탔다. 그걸 몰랐던 나는 그렇게 점심과 저녁을 굶었다. 물론 비행기에서 주문해 먹을 수도 있었는데, 비행기 놓칠까 봐 너무나도 긴장했던 터인지 그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 국내선 비행이 끝이 아니었다. 내가 앞으로 살 동네의 작은 지역 공항까지 한번 더 환승을 해야 했다. 이번에도 시간은 촉박했고, 공항은 너무나도 광활했다. 노트북 가방을 메고, 기내용 캐리어를 끌며 드넓은 공항을 경보하듯 가로질렀다. 다리는 쥐가 날 것 같았고, 배는 너무 고팠지만 보딩 시간에 맞춰 게이트에 도착했다. 계속해서 항공이 연착되면서 시간이 촉박했고, 공항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계산해보니 국제선 비행에서 아침식사로 나온 잉글리시 머핀이 이날의 처음이자 마지막 식사였고, 10시간이 넘는 시간을 꼬박 굶은 상태였다. 밤 10시, 게이트 바로 맞은편에 있는 매점에서 급하게 요구르트를 하나 사서 마지막 비행기에 올랐다.



드디어 동네 공항에 도착했다. 반년만에 만난 남편이 반갑고 좋기보다는 드디어 무한 '비행-공항-비행-공항'의 루트를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텅 빈 학생 아파트에 도착했다. 전날 오전 친정집을 떠난 지 무려 24시간 만이다. 그렇게 나의 유학생 와이프 삶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