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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 미국 이야기/유학생 와이프 일기

[유학생 와이프 일기] 학생 아파트 100동 C호

작은 지역 공항으로 남편과 남편의 친구 부부가 나를 마중 나와주었다. 2번의 경유와 미국 땅에 처음 온 긴장감으로 24시간을 한 숨도 못 잔 나는 너무나도 피곤해서 남편을 반가워하지도 못했고 친구 부부께 감사의 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항공 수하물 2개, 기내용 캐리어 1개, 노트북 가방이라는 어마어마한 짐을 트렁크에 싣고 비몽사몽 하며 학생 아파트로 왔다.



학생 아파트는 남편이 사진으로 찍어 보내준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사진 속 모습보다는 훨씬 낡았고,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온 집안이 차갑게 느껴졌다. 거실과 부엌은 텅 비어있고, 냄비 몇 개와 커다란 쓰레기통 하나 있을 뿐이었다. 남편은 집의 다른 곳을 소개했다. 급한 대로 남편이 이케아에서 주문해 조립한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큰 방, 그리고 접이식 플라스틱 책상이 하나 놓인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첫 학기를 보내며 이 정도 살림을 장만한 것도 남편으로서는 큰 일이었다.


남편 학교의 학생 아파트는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매우 오래된 건물이었다. 시설이 낡다는 단점이 있지만 캠퍼스와 가깝고 캠퍼스 주변의 그 어떤 아파트와 비교했을 때 가장 저렴했다. 5년이라는 기나긴 유학생활을 버텨내기 위해 여러 불편함은 감수해야만 했다. 가장 불편한 점은 주차장이 옥외에 있다는 점이었다. 겨울이 되면 한 달에 두세 번은 삽을 들고나가 차와 차 주변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것이 일이다.



사실 이런저런 불만을 많이 늘어놓기도 하지만 이 아파트 단지를 떠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아름다운 주변 환경이다. 청설모, 칠면조 등 여러 자연 동물을 만날 수도 있고 여름철이면 저녁에 반딧불도 볼 수 있다. 단지 내에서는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아기 엄마들이나 자전거나 킥보드를 타며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항상 만나게 된다. 조금만 걸어나가면 예쁜 산책로도 있다.


내가 사는 지역은 백인 비율이 매우 높은 도시이다. 어디를 가든 백인만 있다. 하지만 이 학생 아파트 단지 내에서만큼은 minority라는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다. 유색인종인 내가 바로 이 아파트의 메인 스트림이니까 말이다.



또한 유학생 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필라델피아 여행에서 만났던 유펜 직원이었던 아저씨도 본인이 외국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에서 일한다고 소개하며 어떠한 이벤트를 여는지 등을 설명해준 적이 있다.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무래도 대개 영어나 미국 생활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이를 위한 프로그램이 많은 편이다. 교회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와서 진행하는 무료 영어 수업이나 이민, 안전 등과 관련된 설명회 등이 열린다. 또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벤트도 많다. 무료한 미국 생활에 나름의 즐거움을 주는 곳이다.


풀밭을 뛰놀던 쥐가 집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마트에서 카펫 청소하는 기계를 빌려 카펫 대청소를 해야 하고, 오래된 화재경보기가 고장 나 한밤중에 직원을 부르기도 하는 등 탈이 많은 오래된 아파트. 언젠가는 이 곳에서의 생활이 참 그리울 것 같다.